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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논문과 개인역사,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까?
개인의 평유역사(또는 임상역사)는 자신의 어제를 더 세심하게 살펴보고, 이해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는 중에 자신과 주변의 이웃들을 찌르고 있는 가시를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빼낼 수 있도록 돕는 자기치유의 과정이다. 물론 단박에 빠지지 않을, 또는 영영 빠지지 않을 수도 있는 가시들이 있다. 가시란 것들이 한번 뽑아내고 그만이면 좋겠지만, 자신도 알게 모르게 계속 뽑히고 박히고 하는 것들인지라 자신의 가시를 -좀 더 고수가 되었다면 타인의 가시까지도- 그냥 계속 안고 견디며 살아가는 법까지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게 있을까. '평유'에 붙어 있는 '역사'라는 말이 단순히 치유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한편으로 그 이상의 무엇을 더 바랄게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씨줄을 발견하고, 공간의 날줄을 발견하고, 그 위에서 나와 이웃이 함께 펼치는 삶의 향연을 볼 수 있는 눈. 그 눈은 바로 역사를 보는 눈이다. 그 눈은 어제의 뒤틀림을 발견하고 또 그 뒤틀림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또는 견디고 사는 지혜를 배우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눈은 평유한 내일을 앞당겨 볼 수 있는 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눈과 가깝게 이어져 있는 손으로 오늘이란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가 좀 길었다.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자. 창업논문과 개인역사쓰기를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까? 우선 창업논문부터 살펴보자.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부(이하 전공부)는 이제 9년차에 접어든다.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그간에 거쳐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전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배우고 가르쳤다. 창업논문쓰기는 역사가 오랜 고등부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전통이지만, 그 논문을 쓰는 방식이나 실습과제와의 연결고리, 방향들은 늘 새로웠고 또 막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창업'논문은 말그대로 내일의 창업을 위한 논문이어야 하고, 2년 간의 인문예술교양 공부와 특히나 논/밭 농사 실습과제는 그 논문을 쓰기위한 하나하나의 디딤돌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괜히 엉뚱하게 낭비하면 그 돌은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창업한 다음에 창업논문에 쓴 그대로 살려면 디딤돌을 잘 놔야 한다. 일반대학에서 소위 논문이라고 하면 주제가 정말 너무나도 미세하다. 그래서 일상의 어디에 가져다 붙여야 쓸모가 있을지 도무지 알길이 없다. 쓴 사람의 온기는 커녕 체취를 느끼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의 설계를 그 논문 쓰는 것만큼의 노력을 들여서 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박사논문은 라면받침이 되버리거나, 간절히 바라는 어떤 삶-정작 자신은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그 어떤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양 착각한 채 입사지원서에 빛나는 한 줄을 장식한다.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짓거리다. 나는 전공부의 창업논문이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갔으면 좋겠다. 쓴 사람의 온기가, 체취가 물씬 풍겨나는 그러면서도 일상에 쓸모있는 것들로 가득찬 열매였으면, 항해 지도였으면 좋겠다. 잠시 창업논문 이야기는 접고 개인역사로 넘어가보자. 전공부와 맞물린 개인역사를 시기별로 구분지어보면 1.입학이전의 역사 2.전공부에서 2년간의 역사 3.아직 시작하지 않은 창업이후의 역사,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획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온 삶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크고 작은 여울목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여울목이란 것이 임상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에 지난 해 수업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다. 그래서 나 역시 내 삶의 여울목은 무엇이었을까 고민하였고, 어렴풋이 짚히는 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풀무에서 1년 반 가까이 지낸 지금-단지 최근이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바로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큰 여울목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 전에 지나왔던 여울목들은 지금의 길로 이어지는 하나하나의 길목이었던게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렇다고 입학 이전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울목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학 이전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고 서술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어제의 뒤틀림을 발견하고 또 그 뒤틀림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또는 견디고 사는 지혜를 배우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 지혜들을 하나하나 실험할 수 있게 도울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이 큰 여울목, 빠르고 거친 시간과 공간을 지나는 동안 평유한 내일을 위한 올바른 방향을, 그리고 실제적인 창업계획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또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다시 땅에 발을 붙여보자. 1학년 봄학기부터 개인 평유역사를 서술하기 시작하는 것은 개념도 부족할뿐더러, 처음 만난 사람들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뭔가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시작은 해야하는 것이 맞다. 생각해보니 입학원서에 자기소개서를 첨부해야 했는데, 그 내용 중에 적게나마 지금까지의 경로를 서술한 이야기가 있었다. 다른 동무들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 부분에 조금씩 살을 붙이고 세밀하게 다듬어 가는 방식으로 개인역사 쓰기 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나중에 다시 가지를 치고, 새끼를 치는 한이 있더라도 1학년 가을학기 후반 즈음에는 서술작업을 일단락 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동무들과 얼마만큼의 관계가 두터워졌을 때 그 문을 여는 것이 바람직할지는 여러모로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1학년 가을학기가 좋을지, 2학년 봄학기가 좋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절한 때에 그 문을 연다면 그 순간에 함께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의미 깊은 시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선생님과는 개인적으로 언제, 어떻게, 얼마만큼 문을 열고 소통하는 것이 좋을지, 역시나 잘 모르겠다. 이 부분은 아예 감도 안잡힌다. 선생님께 숙제를 넘기고 그냥 넘어가자. 1학년 가을학기 후반에는 개인 논/밭 농사 실습과제를 계획해야 한다. 이 즈음에 입학이전에 대한 개인역사쓰기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하면, 창업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좀 더 농익은 고민을 하게 만들지 않을까? 그래서 그 고민이 개인 실습과제로 보다 밀접하게 연결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농사실습과제는 -특히, 생계와 기술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아니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2학년 봄학기 즈음이면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뒤틀림을 발견하고 또 그 뒤틀림을 혼자서가 아니라 이제는 동무들과 함께 바로 잡을 수 있는, 또는 서로 견디고 사는 지혜를 보다 진지하게 실험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풀무에서 지내는 2년이라는 시간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역사쓰기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 2학년 가을학기가 되고, 축제에 접어들면 슬슬 개인 실습과제들에 대한 결과를 정리해야한다. 이 시기에 전공부 1학년 후배들과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농사짓는 분들도 자리에 모셔서 실습과제 결과를 발표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먼길 돌아서 이제 다시 창업논문을 이야기하고, 슬슬 마무리해야겠다. 나는 창업논문이 어떤 특정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개인적인 평유역사 한 편 이였으면 좋겠다. 그가 입학하기 전에 어떤 삶을 살다가, 무엇을 계기로 풀무학교에 들어왔으며-실제로 정말 독특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곳에서 저마다 경험으로 깨달은 또는 바로잡은 것들이 무엇이며, 이제 앞으로 어떤 삶을 살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삶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영위할 것인지 농사실습과제를 토대로 이야기하는, 따뜻한 체취와 쓸모있는 내용으로 가득찬 살아있는 논문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창업식날 동무들이 그 논문, 그 에세이, 바로 그 평유역사를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나는 평유역사쓰기를 통해 치유와 전망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서 온전해 지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누군가의 개인적인 치유와 전망, 온전함이 담긴 평유역사는 개인에 머물러있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 치유와 전망을, 온전함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09.05.02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부 최문철 평유역사가 수업에서
* 풀무학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졸업이라는 말을 창업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풀무학교 과정을 졸업한다고 해서 공부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고, 세상이라는 학교에서 자신의 일을 시작하고 그 안에서 계속 배워나간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정작 졸업이라는 말은 생을 마감할 때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풀무학교 고등부와 전공부에서는 졸업식이 아니라 창업식, 졸업논문이 아니라 창업논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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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수업에서 함께 읽고 난 후 나눈 동무들의 이야기중에 일부와 > 그에 대한 나의 생각
- 고등부의 창업논문은 책 한권 정리하는 느낌. 실제 대학진학, 창업과는 얼마만큼 연관이 있나?
- 논문을 쓴다라기보다 책을 한 권 낸다는 생각으로 | 내 이야기와 과제중점 사이에서의 균형 > 치우칠 순 있어도 누락할 수 없는: 하나로 녹여 낼 수도 있고, 별책부록처럼 넣을 수도 있고 - 개인에게 의미있는 과제, 작업, 논문 > 그게 왜 의미가 있었는지 이야기 할 수 있다면, 평유역사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다면 좋겠다.
- 창업논문의 형태를 보다 자유롭게 열어두었으면 좋겠다. > 지당한 이야기다. 난 그저 하나의 틀을 제시한 것 뿐이다. 주제와 방식은 어디까지나 개인이 결정하고 책임질 일이라고 생각한다. 말그대로 개인의 '창업'논문이니까. - 창업논문의 완결에 대해서도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미완의 창업논문, 진행형의 창업논문, 완벽한 계획이라기보다 앞으로 작성할 논문의 토대정도 > 일단락. 완성을 전제로 하지만 그것이 부담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하지만 미완의 모습으로라도 일단락을 지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함에 대한 부담때문에 시작조차하지 않는 것은 정말 손해다. 어짜피 판단 유보도 선택이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리고 아무리 구체적으로 완결한 창업논문이라 할지라도, 이후에 언제라도 고치고, 빼고, 덧대고 할 수 있는 겸손한 자세,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 역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선생님들도 창업논문을, 평유역사를 쓰셨으면 좋겠다. 평유역사쓰기도 그렇고,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는 것도 그렇고, 길, 이 길이 걸어갈만 한 길이라는 것을 선생님들이 앞서 보여주셨으면 좋겠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학기초에 작성했던 2009년 논/밭농사 실습과제와 논문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남선생님께서도 내가 제안한 방식으로 내 창업논문을, 평유역사를 쓸 것을 강권하셨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아직은 어떤 뚜렷하고 구체적인 갈피를 잡은 것이 아니라서 앞으로 계속 건드려가면서 작업을 시작을 해봐야겠다. 우선은 지나온 길을 추리고 살피는 일 - 풀무학교 전공부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과정을 추리는 일과, 이 곳에서 지내는 동안 내 안팎으로 발견하는 굵직한 흐름들, 여울목의 형세를 살피는 일을 먼저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내 논/밭농사 실습과제들과의 연관성도 살펴봐야겠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 다시말해 원하는 삶의 모습과도 얼만큼 그리고 어떻게 겹쳐지는지 살펴봐야겠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텐데, 지나온 길을 추리고 살피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뚜렷해 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고나면 이전에 세워두웠던 계획 - 이미 시작하고 진행하고 있는 논/밭농사 실습과제들에 다시 손을 대고 조정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뼈대까지 건드릴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앞뒤로 보다 구체적인 연결고리들을 찾는 작업은 꼭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논문주제로 생각해두었던 '유기농업활동과 생태교육' 역시 한걸음 물러서서 내가 정말 창업이후에 할 일, 원하는 삶과 겹쳐지는지 진지하게 다시 살펴봐야겠다.
글을 쓴다는 것, 특히 내 역사를 쓴다는 것에 대해 나는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자기합리화, 그렇게 착각한 바가 점점 더 단단하게 굳어져버림 - 그런 오류를 저지를까봐 나는 몹시 두려워했고-그래서 1학년 때 내 임상역사쓰기를 주저했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하지만 내 입으로 이미 말했고, 머리로 알고 있듯이 창업논문으로 평유역사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이웃에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앞에서 끊임없이 정직하기를, 간절하기를,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열 수 있기를 수 있기를** 바란다. 바라는 바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미화하지 않도록 애쓰기,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하려고 노력하기, 고정될까봐 두려워하지 말고 (글로써) 일단락 맺기, 하지만 일단락 진 매듭도 언제든 번복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귀를 열고 마음을 열기, 일단락을 맺고 또 번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그러니만큼 신중하게 선택하기/글쓰기 등이다.
** 이 말은 언제부터인가 -20대 초반부터라고 생각한다- 마음 속에서 늘상 되뇌여온 말이기도 하다. '내 자신과 주변의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를, 간절하기를,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열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나에게 평유역사를 쓰는 과정은 이 기도의 연장선 위에 있다.
2009.05.09 평유역사가 수업에서 후기내용 한번 더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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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농민교양국어시간에 장기려박사님의 편지를 동무들과 함께 읽었다. 장박사님의 편지는 홍샘이, 김봉숙사모님의 편지는 경례누나가 읽어주었다. 마음이 절절하여 눈물이 났다.
북녘의 아내에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듯 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건만 혹시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두움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40 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당시는 쓰지않던 “택용이 어머니”라고 부른다는것도 이상하고… 어쨌든 여보, 어느덧 40 년이 흘렀소. 6.25 참화로 생이별한 이가 어찌 나뿐이오만 해마다 6월이 되면 뭉클 가슴깊은 곳에서 치미는 이산의 설움을 감당못하고 기도로 눈물을 삭이곤합니다. 택용, 신용, 성용, 인용, 진용, 북에 두고온 다섯애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얘기는 어찌어찌 흘러전해진 소식으로 들었소. 50년 12월 3일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떠날때 둘째 가용이만 데리고 월남한 것이 지금 내 가슴속의 못이 되었다오. 그것이 벌써 40년전. 당신과 내가 나이 여든이 되도록 북과 남에 헤어져 애틋한 그리움만 간직한채 살게되는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소. 의사란 직분때문에 국군야전병원 엠블런스를 얻어타고 평양을 빠져나올때 거리의 아수라장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날 아침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이용못해 임시부교를 건너서나마 좀더 남쪽에 가있겠다고 당신과 다섯아이가 신양리 집을 나선뒤 나는 교회에 가 맹렬히 기도를 했더랬소. 오후 4시경 국군 야전병원일을 해준 관계로 친해진 안소령이 앰블런스를 대고 타라했을때 나는 한두어달후면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이란 생각으로 차에 올랐답니다. 그때 신양리집에는 부모님들도 계셨지만 “중공군이 내려오면 젊은이들은 모두 죽인다니 너만 타고 떠나거라 우리는 집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셔 부모님도 남겨둔째였지요. 그일도 한으로 남았습니다. 피난민들로 북적이는 평양종로 거리를 엠블런스가 달릴때 가용이가 하염없이 창밖을 보다 문득 “아버지, 저기 신용이…”하고 외친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끝내 하지못했소.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환자 차에 얻어타기도 했으려니와 차를 세운다면 피난민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태워달라고 간청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며칠간 당신과 아이들은 걸어서 남하하다가 중공군이 앞질러가는 바람에 울며 평양으로 되돌아갔다는 얘기를 나중에 목격자들한테 들었습니다. 다 내 불찰입니다. 그날 아침 당신과 얘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지않았다면… 또 종로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당신도 기억하지요 50년 9월 16일 그 엄청난 평양공습. 그때의 폭탄은 물체에 부딧치면 곧 터져 수천수만의 파편을 좌우로 흘뿌려 평양거리와 시민을 초토화시킨 무서운 것이었지요. 그때 나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 있었는데 3층지붕에 폭탄이 떨어져 불지옥이 되고 그런 와중에도 수술은 계속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밤새 파편에 맞은 환자들이 쏟아져들어오고 나는 일곱 수술실을 번갈아돌며 모두 49명의 환자를 수술해주고… 그러다 새벽녘 병원앞뜰을 내려다보니 미처 병원에 못들어온 부상자 수백명이 누워 신음하고 있는게 아니겠소. 그때의 울분. 누가 이 사람들을 다치고 죽게 했소. 사상도 이념도 모르고 한 생을 살아왔을 이 민족에게 폭탄을 퍼부은자가 누구란 말이오. 전쟁의 책임을 또 역사의 심판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것입니까. 45년 쏘련군이 진주하고도 5년간을 당신과 나 우리가족은 평양에 살았지요. 공산주의자들이 나의 신앙을 박해하고 어떻게든 유물사관을 심어주겠다고 별렀지만 실패한것을 당신도 똑똑히 기억하겠지요. 당시 내가 김일성대학 의대교수로 있었고 또 김일성 맹장수술도 해주었다는 허황된 소문도 나돌았지만 나는 절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소. 김일성대학 부총장 박일 부속병원장 최필석등이 “1년 후면 장선생을 꼭 공산주의자로 만들어드리리다”고 장담했지만 그 결과는 무었이었습니까. 수술에 앞서 기도하고 주일이면 교회에 가는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지 못했지요. 오히려 그들이 무자비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지 않했던가요. 50년 6월 25일의 민족전쟁은 김일성이 쏘련 진주 군사령관 스티코프의 시사에 의해 도발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와는 공존할 수 없고 어떻게든 타도 괴멸해 공산사회를 세워야한다는 김일성의 신조가 민족의 피를 부른 것입니다. 노동신문은 “남조선 군대가 북침하므로 남에 대한 반격이 불가피하게 시행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진행중”이라고 보도했으나 그날 나는 박헌영이 방송을 통해 “남조선 군대가 먼저 쳐들어왔다”고 말하며 심하게 더듬는 것을 듣고 공산주의자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작용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한 기억이 납니다. 여보, 평화통일에의 꿈은 40년전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지금이나 북과 남의 우리 민족 모두의 염원일 것이요. 특히 북녘에 처자 부모를 두고와 불효자 불민한 남편 그리고 제도리를 못한 아버지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에게는 민족사랑에 의한 평화통일을 보는 것만이 여생의 마지막 소망이기도 하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분단되었던 나라들이 속속 통일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그렇고 예멘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도자와 민족의 슬기로 피흘리지 않고 통일을 쟁취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력에 의한 통일은 반대합니다. 당신과 가족이 보고 싶다고 다시 수천수만의 피를 흘리는 대가로 우리가 재회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배트남은 전쟁을 통해 통일을 얻었지만 남은 것은 가난과 폐허뿐이 아닙니까. 여보, 나는 정치는 모르오. 또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나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위해 헤게모니를 잡기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가, 자기욕심에만 빠지고 공평을 실현하지 못한 정치가들 때문에 동족상잔과 가족이산의 비극이 빚어진 것을 철저히 느낍니다. 평화통일은 민족성원 모두가 공생애를 산다고 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요즈음의 국제정세가 화평의 분위기를 타고 한반도에도 긴장완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하지만 사랑과 평화 믿음이 없이는 진정한 평화통일은 힘들 것입니다. 택용 어머니, 나는 요즈음도 이따금 당신과 아이들의 꿈을 꿉니다. 50년 월남후 부산에 내려와 세운 무료병원 복음병원앞에 당신과 내가 서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 당신을 삼켜가는 꿈도 꾸었습니다. 놀라 일어나보면 텅 빈 방에 혼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당신에 대한 나의 깊은 사랑을 다시 느낍니다.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준 노래를 나직이 불러봅니다. 단풍잎은 떨어져서 뜰앞을 쓸고나간다 누른 국화향내는 바람을 떠나 살더니 처량한 가을이여… 붉은물 풀어놓은것 같이 찬란하다 낙조. 내가 지금 인생의 낙조에 들어섰으니 이제와서 부르라고 당신이 가르쳐준 것이었을까요. 40년을 남한에 살며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나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 뿐아니라 떠나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를 기다렸소. 여보. 몇년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았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들러보고 용천 입암리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 그러나 1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 않을텐데 어찌 나만 가족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도 아는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시기전 이런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육으로는 안될것같아. 영생을 사는 영으로 북녘땅을 밟아봐야지…” 함선생은 벌써 북녘땅을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평화통일이 이루어질것이란 확신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북에서는 종교가 누구에게나 용인되지 않겠지만 당신은 항상 기도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생전에 38선이 열리고 이산가족 모두가 만나 재상봉의 감격을 나눌 수 있다고 믿기에 기쁜 마음으로 이 편지를 끝낼 수 있습니다. 1990년6월 24일, 이산 40년만에 부산에서 당신의 기려.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 꿈속의 당신이 무의촌에 갔다오면서 주머니 속에서 쌀 봉투를 꺼내 주시면 저는 하루 종일 기뻤습니다. 당신이 거기에서도 당신답게 사신다는 것을 혜원의 편지를 받기 전부터 저는 알았습니다. 이산가족들과의 만남이 하루 빨리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팔십이 넘도록 살아 있음이 어쩐지 우리가 만나게 될 약속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썩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 때에 오려나 일구원심 나의 맘에 그대 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암만 말하여도 안타깝기만 하여 이만하고 당신과 기용이네 가족이 건강하여 만나게 될 그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으며 부디 옥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평양에서 김봉숙
김봉숙 사모님의 편지에서 "당신이 거기에서도 당신답게 사신다는 것을 혜원의 편지를 받기 전부터 저는 알았습니다."부분이 마음에 들어와 여러번 새겨 읽었다. 그리고 장기려 박사님의 편지중에서 "이북에서는 종교가 누구에게나 용인되지 않겠지만 당신은 항상 기도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생전에
38선이 열리고 이산가족 모두가 만나 재상봉의 감격을 나눌 수 있다고 믿기에 기쁜 마음으로 이 편지를 끝낼 수 있습니다."를 찾아냈다. (살아온 날이 40년이 채 안된 나로서는 차마 언급할 수조차 없을 만큼의) 긴 시간과 막힌 공간을 사이에 두고도 두 분은 서로에 대한 진한 믿음을 어떻게 이어오셨을까? 두 분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말은 '사랑'이란 말과 다름 없어 보인다. 요즘들어 아내와 종종 사소한 것들로 인해 말다툼을 하는 중에, 그 사소한 것들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서로에 대한 믿음의 문제와 이어져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곤 한다. 이 편지들을 두고 두고 읽으면서 믿음과 사랑에 대해 되새겨 보아야겠다.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위해 헤게모니를 잡기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가, 자기욕심에만 빠지고 공평을 실현하지 못한 정치가들
때문에 동족상잔과 가족이산의 비극이 빚어진 것을 철저히 느낍니다. 평화통일은 민족성원 모두가 공생애를 산다고 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요즘같은 세상이 그런 세상이니만큼, 장기려박사님의 이 말씀이 요즘들어 특히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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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출처: 위키백과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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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목요일, 올 한해 2학년들이 중심을 두고 공부할 실습과제와 논문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1학년과 선생님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각자의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였는데, 발표하는 사람들에게나 듣는 사람들에게나 내용은 물론이고, 그 과정 자체가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작년 가을에 선배들이 한해 농사를 정리하면서 과제발표를 할 때, 마을 분들도 자리에 모시고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과제계획을 발표하면서도 역시나 마을 분들이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나도 작년부터 준비한 계획을 발표했는데, 정리해 놓고 보니 할일이 많다. 과연 올 한해동안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순위-대체로 번호순-에 따라 하는데까지 해봐야지. 그중에 유기농업활동과 생태교육에 대한 논문주제는 여기에 내려오기 전부터 생각하던 것이니만큼 일단 주제는 잘 잡은 것 같다. 강샘은 대상을 좀 더 명확하게 하고, 논농사 실습과제와 연결해서 잘 써보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논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서로 배우면서 방향에 맞게 새끼도 치고, 가지도 쳐내고 하면서 잘 다듬어졌으면 좋겠다. 최근에 호감이 가는 다른 주제가 있었지만 게을러서 미쳐 정리를 못하고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2009년 논/밭농사 실습과제와 논문 계획
2009. 04. 09. 목요일 풀무생태농업전공부 2008 최문철
☆ 2009년 농사 실습과제
<계획, 재배, 관찰, 수확, 채종, 평가 + 가공, 판매> 농사의 전과정을 직접 경험하고, 자립하는 농부로 한층 더 성장하고자 한다.
☆ 논: 추청 유기재배
1. 재배중점: 물 깊이 대서 논풀 줄이기 - 논생물 다양성을 살리는 유기벼농사짓기(이나바씨 방식 실습) - 깊은 물대기를 위한 다양한 물막이 공사 방안 모색: 써레질, 논뚝에 웅어막기 등
2. 과제중점
1) 유기 논농사와 생태교육 - 논배미 (어린이집, 초중고, 전공부, 농민 대상 논생물다양성 생태교육) 프로그램 진행 참여 - 농사체험 (어린이집 등 아이들의 모내기, 벼베기 실습) 프로그램 진행 참여 - 아이들이 논에 접근하기 쉽고 안전한 환경 만들기(다리놓기, 둠벙옆 안전띠 설치하기 등)
2) 논생물 다양성 - 연재배, 둠벙과 수로정비 등 논생물이 더욱 다양해지는 재배환경 만들기 - 실습논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생물을 지속적으로 관찰, 조사, 사진촬영
3) 최대한 기계와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기 - 농업용전기, 양수기 사용을 줄이고 태양광/풍력을 사용한 물공급 방안 모색: 솔라셀과 DC펌프 이용예정 - 인력과 풍력/태양에너지를 활용하는 농기구 만들어 사용하기: 풍력을 이용한 흙탕물 만들기
☆ 밭: 잡곡류 유기재배-거름준비에서 씨뿌리기, 수확, 도정, 가공, 판매까지
1. 잡곡 재배 목적 잡곡은 몸에 필요한 다양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어서 밥과 함께 먹으면 양분균형을 맞출수 있어 건강에 좋다. 또한 생협을 통해 잡곡을 찾는 소비자도 꾸준한 편이다. 일반농가에서는 자급을 목적으로 소량 생산하기 때문에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적다. 그리고 잡곡은 미숫가루로 가공해서 판매할 수도 있고, 장기 보관 판매에도 유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가족의 건강한 먹거리 자급과 가계소득을 위해 2009년 밭농사 실습과제로 잡곡재배를 선택하였다.
2. 재배중점: 파종, 시비, 제초, 수확 등의 시기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계획, 실행, 기록 - 유기재배를 위해 병충해, 밭풀을 어떻게 대비할지 계획. - 햇빛이 드는 방향과 작물의 키에 따라 적절하게 심는 위치 선정. - 특히 새와 바람의 피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와 - 수확 후 처리, 선별, 도정 작업 방안을 모색
3. 과제중점: 학교생협 판매 / 미숫가루 가공 - 잡곡류 시장조사 / 포장단위, 방식, 가격 결정 - 미숫가루 배합, 가공방식 공부
4. 재배할 잡곡의 종류: 수수, 녹두, 조, 기장, 콩류(쥐눈이콩, 서리밤콩, 작두콩, 까치콩) - 잡곡선정기준: 미숫가루를 만들 때 필요한 잡곡류 위주, 멥쌀보다는 찹쌀
☆ 논문: 유기농업활동과 생태교육 1. 장애/비장애, 성인/청년/아동(학생)을 대상으로 2. 유기농업과 생태교육(치료)을 연결하는 다양한 가능성의 고리들을 발견하기 - 농업과 교육, 농업과 치료 관련자료 수집 - 논배미, 농사체험 등 유기농업과 연계한 생태교육 프로그램을 진행, 관찰기록, 효과 분석 - 농업활동 시기마다 적절한 교안/프로그램 구상 - 방식: 논밭에서 작물재배 / 생물다양성 조사 / 놀이를 활용한 교육, 치료 프로그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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